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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가우디의 고백

limeon 2024. 8. 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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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고백

 


1852년, 나 (Antoni Plàcid Guillem Gaudí,1852~1926), 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마을 리우돔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세스크와 어머니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내 어린 시절은 건강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류마티즘으로 인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형이 나를 업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덕분에 나는 자연의 신비를 탐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타고난 약골, 타고난 예술혼 

 

 

여름 별장에서 보내는 긴 시간 동안, 나는 자연의 형태와 색채에 매료되었고, 그것이 나의 건축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나는 가족의 공방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도우며 공간과 부피를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바로가기> 가우디의 연인, 페피타의 고백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었고, 그의 감탄은 나를 건축가의 길로 이끌었다. 군대에서의 나날은 결핵으로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나는 편안하게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제대 후, 바르셀로나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5세에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제 나는 본격적으로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청의 여러 프로젝트를 맡으며 수입도 늘어났고, 친구들과의 밤거리는 나의 창의력을 더욱 자극했다. 

 

 

직선 없는 곡선의 건축물 

 

 

나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며, 독창적인 건축 세계를 만들어갔다. 내 건축물은 직선이 없고, 곡선이 지배하는 독특한 형태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혹평도 받았다. “생쥐굴”이나 “불길한 해골 무더기”라는 표현은 나를 괴롭혔지만, 나는 내 길을 계속 걸어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프로젝트였다. 처음에는 다른 건축가의 계획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가 사임한 후 나는 이 프로젝트를 이어받았다.

 

 아르누보 스타일로 변형하여 설계하고, 내 남은 생애를 이 성당에 바쳤다. 그러나 1926년, 나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25%만을 완성했다. 성당의 동부 성만이 완성된 상태였다.

내가 사망할 당시, 가톨릭 교회는 나의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자연의 창조물이 인간의 창조물보다 높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완공된다면,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 될 것이었다.

 

 

검소한 삶이 부른 죽음 



내 외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격히 변했다. 젊었을 때는 멋진 양복을 입고 문화생활을 즐겼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검소한 삶을 살았다. 

 

결국, 나는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노면전차에 치였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인해 나는 방치되었고, 병원에서도 노숙자로 오인받았다. 

 

안토니 가우디의 초상화

 

 

치료를 거부하며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고 말했지만, 결국 나는 6월 10일,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내 장례식은 스페인의 반 국장으로 치러졌고, 나는 내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내 독창적인 건축물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나는 이제 영원히 바르셀로나의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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